얼마 전 재벌 소재의 드라마에서 직원들을 머슴이라고 발언하는 재벌 총수의 대사를 보고 어쩌면 진짜 우리들이 재벌들의 눈에는 단지 머슴으로 보일 뿐일 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에 머슴에 대한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
자료를 찾아보며 깨달은 점은 역시 우리는 머슴이라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상급자님들의 지시에 예예로 대답해야하고 시키는대로 일하면서 창의력이라고는 필요하지 않는 그런 현실이 과거의 머슴과 그렇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홀대 받고 설움에 울던 그 시절 '머슴살이'
‘머슴’이란 고용주의 집에서 같이 살며 ‘새경(私耕)’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업임금노동자로 고공(雇工)·고용(雇傭)·용인(傭人)이라고도 한다. ‘머슴’의 종류에는 노동력과 농사경험에 따라 ‘상머슴’과 ‘중머슴’, 보조노동을 하는 ‘꼴담살이(꼴머슴)’가 있다.
고용기간에 따라서는 ‘달머슴(月傭)’과 ‘반머슴(季節傭)’이라는 것도 있었고, ‘고지(雇只)머슴’이라 하여 일정한 토지나 가옥, 식량을 대여 받고 일정기일을 노동하는 ‘머슴’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머슴’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증가추세를 보이다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들어와서 일제의 토지약탈과 인구증가로 몰락농민(沒落農民)과 함께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머슴은 농번기(農繁期)에는 아침부터 잠자기 전까지 ‘머슴밥’이라고 하는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하루 5∼6차례 먹어가며 소와 같이 강도(强度) 높은 농사일을 하고, 농한기에는 퇴비(堆肥)와 연료를 채취하고 가마니짜기 등을 한다.
‘머슴’의 임금(賃金)을 ‘새경’이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사경(私耕)’이라고 하며 보통 현물로 지불되었다. 고용주(雇用主)의 가족들은 ‘머슴’을 ‘하인(下人)’과 동일시하여 반말을 하는 등의 노골적인 인격 손상행위(損傷行爲)를 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차별대우(差別待遇)를 했고, ‘머슴’도 이의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8·15 이후에도 ‘머슴’제도는 그대로 존속(存續)되었고, 6·25를 겪은 후부터는 더욱 증가했다. 1950년에는 남한에만 27만 578명의 ‘머슴’이 있었으나, 이후 학교교육(學校敎育)의 보급과 군복무, 산업화로 인해 점차 사라져갔다.
* 다른 자료에 의하면 깔담살이는 해방 이후부터 없어졌다고 하네요. 상제님이 일본을 깔담살이 머슴이라고 하셨는데 일본이 물러가면서 깔담살이 머슴도 없어졌다는 것이 의미가 있더군요.
‘머슴’ 중 ‘상머슴’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25-43세의 농사경험이 풍부한 장년층(壯年層)이 해당되었고, 50세 전후의 중노년층(中老年層)은 ‘중머슴’, 19세 미만의 청소년과 55세 이상의 노년층(老年層)은 ‘담사리’로 등급이 매겨졌다.
* 담살이는 깔담살이를 의미합니다. 이 자료에서는 애기머슴 뿐만 아니라 노동력이 떨어지는 노년층도 깔담살이였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상머슴’은 최고등급의 머슴에 대한 호칭(呼稱)으로 체격도 체격이지만 경륜 또한 지긋해서 한 해의 농사쯤은 훤하게 꿸 수 있는 경지(境地)에 이르기도 했다. 거기에다 모내기 무논의 써레질까지 능숙해야 마을 전체가 공인(公認)해 주는 ‘상머슴’이 될 수 있었다.
그만은 못하지만, 누가 봐도 손색(遜色)없는 장골(壯骨)의 체격에 곡식 선 ‘밭고랑’의 ‘보습질’을 할 만하면 ‘중머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어린 머슴은 ‘꼴머슴’이었다. ‘머슴’이라는 명칭은 중부지방 일원에 분포되어 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앞서 말한 명칭 외에 머섬, 머심, 머음, 담사리, 도사리, 작남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지방에서는 주로 ‘머섬’이라고 지칭했었다.
‘머슴’의 등급은 마을 사람들의 종합적(綜合的)인 평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을마다 그 기준이 정확하게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육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노동력(勞動力)을 갖고 있는가, 사람이 성실(誠實)ㆍ근면한가, 정직(正直)한가 등이 주요한 평가항목이었다.
그리고 적정(適正)한 평가를 받았다 해도 ‘늦잠자기’나 ‘술주정’, ‘폭력성’이 인정되면 감봉요인(減俸要因)이 되었다. 이 경우 감봉을 당한 ‘머슴’이 그 처분(處分)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마을에서 퇴출(退出)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평가를 받았던 일단 ‘머슴’으로 고용(雇用)되면 음력 2월부터 섣달까지 농번기(農繁期) 때는 해도 뜨기 전인 새벽 5시께 일어나, 해가 지고 어두워져 논밭의 일거리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손을 멈출 수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은 대개 밤 9-10시였고,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머슴’들에게는 가혹한 노동조건(勞動條件)에다 먹고 입는 문제, 인격적인 멸시(蔑視), 주인 측의 ‘새경’계약 위반 등으로 불평ㆍ불만이 많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머슴’들에게서는 그 나름의 '창의성(創意性)'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에다 옛적의 ‘머슴’들에게는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다. 태어나서 자기 집에서 부모들이 지은 ‘갑돌이’나 ‘막동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하더라도 머슴살이를 시작하면 천민(賤民)의 이름으로 바뀌기 일쑤였다.
거의가 ‘돌쇠(釗)’, ‘마당쇠’, ‘떡쇠’ 등이었고, 특이한 경우 ‘변강쇠’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여기에서의 ‘돌쇠’는 남성성(男性性)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가장 흔히 쓰였고, 이것은 돌(石)이나 쇠(釗)같은 단단하고 강한 것에 남성성이 전이(轉移)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돌쇠’의 ‘쇠’는 철(鐵)을 말하는 것으로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이루는 원동력(原動力)이 고도로 발달한 신라(新羅)의 철기문화(鐵器文化)에 기인한 것처럼 '강인한 남성은 쇠'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서 마당을 쓰는 하인(下人)은 '마당쇠'가 되고, 떡메를 잘 치는 ‘머슴’은 '떡쇠', 정력(精力)이 좋은 남자는 '변강쇠'로 부르는 등 남성의 상징(象徵)으로 ‘쇠’를 붙여 썼다.
대농(大農)에 고용된 ‘머슴’들은 주인집에서 숙식(宿食)을 하면서 씨를 뿌리고 거두기까지 농사일을 도맡아 했다. 뿐만 아니라 집안일과 온갖 허드렛일도 했다. 예컨대 주인을 위해 ‘토끼잡이’를 나간다거나, 주인집 아이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오면 때린 아이를 찾아내서 응징(膺懲)하는 일까지 맡아서 했다. 그래서 세도가(勢道家)의 ‘머슴’은 여간 도도하지가 않았다.
‘머슴’은 당연히 부지런해야 했고,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다. 동트기 전 새벽에 일어나 농사도구(農事道具)를 손질하거나 일찌감치 들에 나가 일을 시작했다. 일이 적은 겨울철에는 장작을 패거나 땔감을 준비하고 마당을 쓰는 등 아침 식전(食前)에 해야 할 일은 항상 있었다.
대가(代價)는 연봉(年俸) 개념과 같은 ‘새경(私耕)’을 받았다. 대체로 경력과 연령을 기준으로 하는 등급(等級)에 따라 1년에 쌀 몇 섬을 받았지만, 장가를 보내주겠다거나 동생 공부를 시켜주겠다는 조건(條件)으로 공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다.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라 어린아이들도 ‘머슴살이’를 했는데, 어린 머슴은 꼴이나 뜯는다 해서 ‘꼴머슴’이라 불렀다. 어린 머슴은 ‘새경(私耕)’이 따로 없이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으로 족했다. 당시 초등학교(初等學校)생 중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말자 ‘꼴머슴’살이를 한 아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에다 당시의 ‘머슴살이’에는 분명한 계약(契約)이나 회계처리(會計處理)가 없던 시절이라 ‘새경’과 조건은 잦은 말썽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실컷 부려먹고 ‘새경’ 한 푼 안 주고 내쫓거나,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는 주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은 주인집 딸과의 결혼(結婚)을 조건으로 ‘머슴살이’를 하는 주인공과 장인(丈人) 될 사람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지만, 대체로 머슴살이의 설움은 감내(堪耐)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포항(浦項)에 해병훈련소(海兵訓練所)가 창설되고부터는 ‘머슴살이’에 회의를 느낀 많은 외동읍(外東邑) 출신 ‘머슴’들이 기구한 자신의 운명(運命)을 뒤집어보고자 해병대 입대(入隊)의 러시를 이루기도 했었다. 당시의 해병대는 학력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머슴’들이 지원(志願) 입대할 수 있었다.
* 군대가 머슴의 신분상승을 하게 만든 이면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비인간적(非人間的)인 주인으로부터의 모멸감(侮蔑感)을 참지 못해 대판 싸움을 벌이고 뛰쳐나와 이웃과 부모님의 축하(祝賀)는커녕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야반도주(夜半逃走)라도 하다시피 입대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송별잔치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떠나곤 했었다.
그렇게 떠난 그들이 6개월여 지난 후 휴가(休暇)를 받아 카키색 제복(制服)에 멋있는 해병대 군모를 젖혀 쓰고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니며, 무용담(武勇談)을 늘어놓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 전의 추억이 되어 버렸다.
1960년대 이전만 해도 우리 농촌의 모습은 지금처럼 경지정리(耕地整理)가 잘된 논, 밭에서 제초제(除草劑)와 각종 농약을 분무기로 살포하며, 경운기(耕耘機)로 논밭을 갈고, 콤바인으로 벼를 베는 현대화된 기계농법(機械農法)이 아니었다.
호미와 낫, 괭이와 삽과 지게를 이용한 수작업(手作業) 농법이었으며, 쟁기로 논밭을 가는 원시적 영농방식(營農方式)이었다. 때로는 사람이 소를 대신하여 쟁기를 매고 끌기도 했었다. 농우(農牛)가 있더라도 마지막 보릿골 타기는 사람이 쟁기를 끌었다.
당시의 대부분 농가 살림살이는 춘궁기(春窮期)나 칠궁기(七窮期)를 면하기조차 어려운 빈곤의 악순환(惡循環)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한 해 농사의 준비가 서서히 시작된다. 여기에서의 칠궁(七窮)이란 농가에서 음력 칠월에 묵은 곡식은 다 없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까닭에 가장 어려운 철임을 일컫는 말이다.
전답(田畓)깨나 가진 부유층은 일손이 바쁜 모심기나 수확기(收穫期) 같은 농번기에 대비하여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줄 한 두 명의 머슴을 들이기 위해 수소문(搜所聞)에 바쁘고, 끼니를 갈망하는 식구들의 처지를 위해 남의 집 ‘머슴살이’로 들어가야 할 사람들은 인심 좋은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가기 위해 가슴을 조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당시의 ‘머슴살이’는 언제나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저 ‘예예’하며, 굽실거리는 순복(順服)만이 있을 뿐이었다. 소처럼 우직하고 기골(氣骨)이 장대하여 허우대가 있는 젊은이는 ‘새경’도 많이 받을 수 있고, 나이 들어 외양이 꾀죄죄한 늙은이는 ‘새경’도 적어 신체(身體)의 조건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기도 했었다.
‘새경’은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1960년대의 경우 ‘상머슴’이라야 벼로 열섬(쌀 10가마니)정도가 고작이었다. 지금의 시세(時勢)로라면, 연간 150만원 수준이다. 월봉(月俸) 300만원짜리 직장인의 반달 월급이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계약서(契約書)를 쓸 수도 볼 수도 없었던 ‘머슴’들이 많아 소개인(紹介人)의 입회하에 한 해 동안의 고생살이가 종이 한 장 없이 구두계약(口頭契約) 만으로 결정이 되곤 했었다.
‘머슴’은 한 집안에서 식구처럼 살면서도 신문지(新聞紙)나 마분지로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대문간의 ‘봉로방’이나 외양간에 붙은 외딴방에서 지내야만 했다. 짐이라고는 괴나리봇짐 속에 든 헌 옷 몇 벌과 주인집에서 주는 검정 헌 이불과 시렁에 얹혀져있는 목침(木枕)이 전부였다.
‘머슴’으로 고용된 첫 날은 주인과 함께 자신이 묻혀 살아야할 논과 밭다랭이며 방죽 밑의 논배미들의 한계(限界)를 대충 둘러보고,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주인집 선산(先山)의 경계를 알아보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바로 내일부터 시작될 고된 일을 위해 농기구(農器具)를 챙긴다.
수굼포(삽)와 괭이, 호미자루를 점검하고, 지게와 바지게, 쟁기와 똥지게, 소등에 얹을 ‘질매’와 외양간의 ‘작두’, 쏘오래이(쇠스랑)와 갈쿠리까지 봄철농사에 소용(所用)되는 모든 농기구를 수선(修繕)하거나 점검한다.
저녁 식사를 위해 ‘봉로방’으로 차려 온 개다리소반에는 밥그릇이 넘치도록 고봉(高捧)으로 담은 보리밥에 ‘쌀태기’가 드문드문 섞여 있고, 시래기 된장국과 보리고추장, 그리고 시큼한 묵은 김치가 놓여있다.
입맛이 왕성(旺盛)한 ‘머슴’은 보리밥에 김치를 척척 걸쳐서 입이 미어지도록 먹다보면 게 눈 감추듯 삽시간에 밥그릇을 비워낸다. 옛말에 소와 머슴은 먹성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한 참 바쁜 농번기(農繁期)에 소와 머슴이 비틀비틀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리라.
식사를 끝내고 쌈지(담배, 부시 등을 담은 주머니)를 열어 종이에 담배를 말아 한 대 피우고 나서는 일찌감치 목침(木枕)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든다. 불룩 튀어 나온 배가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反復)하면서 드르릉 드르릉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기만 하다.
새벽닭이 울고 동녘이 희멀겋게 밝아오는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작두질 ’해 둔 ‘여물’을 쇠죽솥에 넣고 ‘희나리(채 마르지 않은 장작)’를 무릎으로 꺾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쇠죽을 쑨다. 그리고는 마당가 두엄더미를 수습하고 비질을 한다.
당시의 ‘상머슴’들은 ‘머슴살이’에 이골이 나서 그런지 비록 낯선 곳에 왔지만, 주위 사람과 쉽게 어울려 금방 친숙(親熟)해지고, 농사일이라면 매사에 눈썰미가 있어 척척 해내며 주인으로부터 신임(信任)을 얻는다. 동네 사람들은 ‘머슴’의 이름보다 아무개집 머슴으로 호칭(呼稱)해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들에 나갈 일이 없는 비오는 날이면, 동네 머슴들이 뒷 곁 ‘토담방’에 모여 앉아 새끼를 꼬기도 하고 멍석을 만들기도 한다. 서로가 처지(處地)는 같지만 고향도 이름도 다르고, 나이가 들쭉날쭉해도 구수한 우스갯소리와 호탕한 웃음 속에서 오랜 세월 같이 지내온 듯이 금방 한통속이 된다.
그들은 빠른 손을 놀려 쉴 틈 없이 새끼를 꼬고, 멍석을 만들면서도 고참(古參) 머슴들이 ‘머슴’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슴에 안고 살았던 질곡(桎梏)과 숫한 애환(哀歡)이 담긴 하소연을 늘어놓으면 모두들 숙연(肅然)해지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누군가의 입에서 음담패설(淫談悖說)이 나오기 시작하면 금방 웃고 떠든다. 그들이 처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흐르는 시간이다. 돌려가며 하는 그들의 이야기들은 고된 줄도 모르고, 술술 풀리는 실타래처럼 끝없이 이어져만 간다.
어느 부잣집 젊은 마님이 ‘큰 머슴’을 가만히 집 모퉁이로 불러내어 밥풀이 둥둥 뜬 ‘동동’주 한 사발을 떠다 주면서 귓속말로 ‘작은 머슴’ 오기 전에 빨리 마시라고 하고, 또 어느 때는 ‘작은 머슴’을 불러내어 같은 방법으로 꼬드긴다.
고지식하고 우둔한 ‘머슴’들은 마님이 자기만 사랑하는 줄 착각하고, 이루지 못할 짝사랑에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면 방안은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누군가는 자기도 뒤질세라 같은 이야기들이 마냥 계속된다. 청상과부가 된 주인집 마님이 젊은 ‘머슴’과 곳간 안에서 놀아났다는 이야기며, 어느 집에서는 주인집 처녀가 ‘머슴’과 눈이 맞아 배가 불러오자 이를 눈치 챈 주인이 가문(家門)에 먹칠을 할까 봐 한 살림 톡톡히 마련하여 다시 찾아오지 못할 첩첩 두메신골로 쫓아냈다는 돌림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들만의 천일야화(千一夜話)였다.
당시의 머슴들은 이렇듯 호방(豪放)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妻子息)이 자꾸만 떠오르고, ‘머슴’이라는 처지 때문에 생과부가 된 아내 곁으로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아내의 옷고름을 풀어 보고픈 심정을 억제하며, 명절(名節)의 휴가(休暇)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고된 ‘머슴살이’의 한 해가 끝나고 나면 정한 곳도 없이 또 어디로 떠나야할 지 모르는 떠돌이 신세의 회한(悔恨)을 가슴에 안고, 타고난 운명과 팔자타령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체념(諦念)하고 사는 것이 편한 삶이었겠지만,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어느 마을 어느 집으로 또 팔려갈지를 새롭게 걱정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
이하에서는 일제시대 때 대농(大農)의 ‘머슴’으로 고용된 이들의 ‘새경’과 처우를 알아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새경’아란 농가(農家)에서 ‘머슴’에게 한 해의 품삯으로 연말에 주는 보수(報酬)를 말한다.
실예로 괘릉리의 한 ‘부농(富農)’ 집안에서는 머슴을 연말에 내보내고 정월에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머슴’ 새경(賣身例定金)은 대체로 연말에 주는 후불제(後拂制)였고, 현금이나 현물로 지급되었다.
그리고 ‘새경’ 외에 농번기가 끝난 후, 혹은 명절(名節)이면 약간의 돈을 용돈으로 주기도 했다. 철에 따른 일상품(節時諸品)으로 주머니, 댕기, 토시, 버선, 허리띠, 대님, 신발(囊幷繩, 唐其, 吐手, 襪子, 腰帶, 丹任, 痲鞋) 각 1건씩과 작업복으로 옷 두 벌(춘, 하 短衫)이 기본적으로 지급되었다. 그 외 연말에 백미 1되 정도와 어육(魚肉)이 지급되기도 했다.
‘상머슴’의 ‘새경’은 ‘머슴’의 능력에 따라 현금(現金)으로 20냥 정도가 1920년까지의 기본노임(基本勞賃)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소작지(小作地)를 2-3두지 급여하였으나, 소작료(小作料 ; 土稅)는 ‘머슴’이 부담하도록 했다.
‘작은 머슴’이나 ‘꼴머슴’은 현금(現金)으로 약간의 돈을 받거나 가족에게 소작지(小作地)를 대급(貸給)하는 정도였다. 어린 머슴에게는 철에 따른 옷 세 벌로 ‘새경’을 대신하기도 했다.
당시 솜을 둔 겹옷은 7-20냥까지 평가(評價)되었다. 1년 ‘새경’이 20냥인데 옷 한 벌에 20냥이라니 이만저만 바가지가 아니었다. 어린 머슴은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주는 것도 물자(物資)가 귀한 때라 노임지불에 상쇄되어 받을 게 있을 수도 없었다. 1920년에는 ‘상머슴’의 새경이 25냥 수준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새경’이 20냥이라도 약간 면적의 소작지(小作地)를 급여하는 것이 상례화(常例化)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살 집(戶)을 제공하기도 했고, 1925년경에는 대세(貸稅)를 감해 주기도 했다. 머슴의 ‘새경’이 실질적으로 오른 것이다.
그만큼 ‘머슴’이 귀해졌다는 얘기다. 일제(日帝)가 온 나라의 장정들을 대륙침략(大陸侵略)을 위한 철도건설 등 부역(賦役)에 동원하다보니 그만큼 농사지을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상머슴’의 ‘새경’ 20냥은 1908년 당시 쌀값으로 환산(換算)하면 쌀 11말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쌀값이 오르자 ‘새경’은 쌀 5두(斗) 이하로 하락(下落)되기도 했다. ‘새경’을 가치가 올라가는 현물이 아니라 점차 가치가 떨어지는 현금으로 고정(固定)하여 지급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죽으라고 일을 해줘도 연봉(年俸)이 쌀 다섯 말로 한 가마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법이 그런 것이 아니고, 부자들이 ‘새경’을 현물(現物)로 주지 않고 현금(現金)으로 지급하면서 1908년에 정한 금액을 1920년대까지 인상하지 않고 동결(凍結)해 버렸기 때문이다. 머슴은 최대한 부려먹고 임금(賃金)은 가급적 주지 않거나 최소한(最小限)으로 지급하는 것이 당시의 부자들이 구가하던 치부수단(致富手段)이었다.
이렇듯 인색하기만 하던 현금(現金) ‘새경’도 1930년에는 35냥으로 인상되었고, 이후 1940년에는 현물(現物) ‘새경’으로 전환(轉換)하여 쌀 8두(斗)를 지급하였다. 부자들이 인심을 쓴 것이 아니고, 쌀값이 그만큼 떨어졌기 때문이다.
일제가 장정(壯丁)이라는 장정은 모조리 징용(徵用)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일꾼이 그만큼 귀한 탓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수백석의 농사를 지어주는 ‘머슴’에게 1년 연봉(年俸)이 겨우 쌀 여덟 말이라니 문자 그대로 노동착취(勞動搾取)였다. 기껏해야 너 말들이 두가마니에 불과하여 지금의 가격으로 최고 30만원에 불과하다. 기술노동자(技術勞動者)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
그러나 양식(良識)있는 다른 많은 주인들은 ‘머슴’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우하면서 총각인 경우 적절한 시기에 혼수(婚需)까지 준비하여 참한 신부감을 물색하여 혼인(婚姻)을 시켜주고, 소작논을 조금 내주어 생활의 기반(基盤)까지 마련해주는 등 온정을 베풀기도 했다. 당시의 외동읍에서는 지금과는 달리 '장롱' 등 중요한 혼수는 신랑측에서 마련했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추수가 끝난 전답(田畓)에 가을보리와 마늘씨를 넣고 나면 한 해의 농사는 끝이 난다. 그러나 설까지는 두어 달이 남아 있어서 ‘머슴’들은 주인집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땔나무 비축(備蓄)에 나선다. 새벽마다 질매(길마)를 얹은 소들의 행렬이 인근 산중으로 떠나고, 저녁마다 고샅에 꽉 차는 나뭇짐 바리들이 마을로 밀려든다.
그러면서 집집의 나뭇더미가 쑥쑥 자라 오르고, 집채보다 더 크고 높아진 더미 위로 청솔 이엉이 이어지면 농가의 추수동장(秋收冬藏)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면서 ‘머슴’들의 고된 1년 고용살이도 끝을 맺게 된다.
작별을 앞둔 머슴과 주인이 연중 두 번째의 겸상(兼床)을 한다. 그간 서로의 노고(勞苦)와 배려(配慮)에 인사를 차리면서 격의 없는 대작(對酌)을 한다. 그러나 내년의 농사나 재고용(再雇用) 같은 것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러고는 조청(造淸)이나 곶감 등 설맞이 먹을거리를 싸서 보내면서 작별을 한다. 마치 사랑방에서 며칠을 유했다가 떠나는 나그네와 주인같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그렇게 천연스럽고 정중(鄭重)하게 이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 보름을 쇠고 나면 노사(勞使)의 물밑 접촉이 활발해진다. 음력 2월초하룻날의 영등제(影燈祭)를 올리고 나면 바로 농삿철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먼저 다급해지는 것은 언제나 주인 쪽이었다.
달포 전에 떠나보냈던 작년의 ‘머슴’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집안의 흉이 된다. 그것은 지난해의 노사불화(勞使不和)를 뜻하면서 자연 주인 쪽의 허물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측의 ‘거간’이 ‘머슴’을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장(場)거리 주막(酒幕)으로 불러내기도 하면서 은밀한 정성을 들이지만 타결(妥結)이 수월하지는 않았다. 마을 전체가 그들의 흥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상머슴’의 경우에는 마을의 전 노사(勞使)가 연관되는 것이어서, ‘머슴’들은 ‘머슴’들끼리 동네 ‘초당방(草堂房)’에서, 주인측 사람들은 그들대로 이웃 ‘사랑방’에서 눈에 띄지 않게 회동(會同)하면서 각 진영의 복안과 이해(利害)를 조율하는 것이다.
겨울을 넘길 것 같던 ‘상머슴’의 협상(協商)이 어느 밤에 갑자기 성사되고 나면, 동네의 나머지 흥정들은 바로 끝을 맺는다. ‘상머슴’의 ‘새경’에 각자의 등급과 차등치(差等値)만 적용하면 되고, 그것은 노사(勞使)와 마을 전체가 공지(公知)하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파격적(破格的)인 우대도, 편파적인 홀대도 없는 고용계약(雇傭契約)들이 마무리되면 마을은 바로 새로운 한 해의 농사로 몰입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