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의 문화재 정리

by digipine posted Nov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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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양군

 

1)단양신라적성비

 

종 목 국보 제198호

지 정 일 1979.05.22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시 대 신라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10인의 고관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2)온달산성

 

종 목 사적 제264호  

지 정 일 1979.07.26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시 대 신라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전기에 이미성산성이란 이름으로 있었던 기록이 있다.

 

벽의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린, 둘레 683m의 소규모 산성이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며, 우물터가 남아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2.제천시

 

1)사자빈신사지석탑

 

종 목 보물 제9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002

시 대 고려시대

 

 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상·하 2단으로 된 기단위에 4층의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기단은 글이 새겨져 있어 탑의 조성 경위를 알 수 있으며 위기단은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네 모서리에 한마리씩 배치한 사자의 안쪽 공간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양식은통일신라시대의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이 밖에도 몇 기의 탑이 더 전해지고 있다. 현재 탑신에는 지붕돌이 4층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는 9층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고려 현종 13년(1022)에 만들어진 이 탑은 연대가 확실하여 각 부의 구조와 양식, 조각수법 등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탑이다.

 

 

 

2)청풍한벽루

 

종 목 보물 제528호

지 정 일 1971.01.08

소 재 지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 당시 청풍현 출신 승려인 청공이 왕사가 되어 청풍현이 군으로 올려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객사의 동쪽에 세운 건물이다. 원래 위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댐을 세우면서 1983년 청풍면 물태리로 옮겨 세웠다.

 

구조는앞면 4칸·옆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옆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하였으며 사방에 난간을 둘렀다. 건물 안에는 송시열·김수증의 편액과 김정희의 ‘청풍한벽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밀양의 영남루(보물 제147호), 남원의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함께 본채 옆으로 작은 부속채가 딸려 있는 조선시대 누각 건물의 대표적인 예이며, 세 건물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3.충주시

 

1)중원탑평리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11

시 대 통일신라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임충민공충렬사

 

종 목 사적 제189호

지 정 일 1969.11.2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단월동 385-1

시 대 조선시대

 

 충민공 임경업(1594∼1646)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숙종 23년(1679)에 사당을 세웠고, 1706년에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 3년(1727)에는 사당 이름을 충렬사라 했다.

 

현재 충렬사에는 장군이 사용했던 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사당 앞 왼쪽에는 장군 부인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부인완산이씨 정렬비’가 있다.

 

 

 

4.음성군

 

1) 음성김주태가옥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141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239-1

시 대 조선시대

 

 약 300년 전에 이익이 세운 집이라고 전하지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사랑채는 건물에 적힌 상량문에 따르면 1901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에띠는 정원시설물은 없으나 공간의 짜임새가 인상적이며 아름답다. 특히 중문인 일각문을 통해 안마당에 이르고 부엌을 거쳐 뒷마당에 출입하는 공간구성은 이 집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2)음성오층모전석탑

 

종 목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5.08.20

소 재 지 충북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817-12

시 대 고려시대

 

 모전석탑은 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돌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탑이다. 이 탑은 원래 교동사터에 남아 있던 것으로, 1946년 수봉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가 1995년 이곳 음성향토자료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세웠다.

 

1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인데, 현재 탑신의 2층과 5층의 몸돌이 없다. 1층 탑신의 몸돌 네 면에는 중앙에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새겼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전탑에서와 같이 층단을 이루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 이후 안동, 의성 등지를 중심으로 전탑과 모전석탑을 세우던 시기에, 그 지역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진천군

 

1)연곡리석비

 

종 목 보물 제404호  

지 정 일 1964.09.03

소 재 지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2

시 대 고려시대

 

 이 비에는 글씨가 쓰여지지 않았으며, 또한 비의 주인공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처음부터 비문을 새기지 않은 것인지 지워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비머리에도 네모진 비의 이름을 쓰는 자리만 마련되어 있을 뿐 글씨는 없다.

 

받침부분은 비몸돌과 머리부분을 지탱하기 위한 중요한부분으로 거북머리의 모양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말의 머리에 더 가깝다. 비의 윗부분에는 아홉 마리의 용을 새겼다.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조각기법도 우수하다.

 

조형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석비로 추정된다.

 

 

 

2)삼용리백제토기요지

 

종 목 사적 제344호  

지 정 일 1991.02.26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삼룡리 산518-10

시 대 백제

 

 요지란 도자기, 그릇, 기와들을 굽던 가마터이다.

 

백제 때의 가마터로서 가까이에 비슷한 시기의 산수리 가마터도 있다. 출토된 유물은 주로 두드림무늬토기(타날문토기)인데, 모습은 몸통은둥글고 주둥이가 짧은 것과 화분 모양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3세기 이전에 유행하던 토기인 두드림무늬토기를 만들어 내던 대형 가마터로서 당시 토기 제작수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6.괴산군

 

1)괴산원풍리마애불좌상

 

종 목 보물 제9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124-1

시 대 고려시대

 

높이가 12m나 되는 큰 암석을 우묵하게 파고, 두 불상을 나란히 배치한 마애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 신체의 표현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형식화되었다.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무딘 선으로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으나, 세부수법은 닳아서 잘 알 수 없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예는 죽령마애불, 전 대전사지출토청동이불병좌상 등이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의 설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괴산미륵산성

 

종 목 사적 제401호

지 정 일 1997.12.1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산8-37외

시 대 고려시대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있는 벽은 길이 700m에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보인다. 이 성은 4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쌓은 점이 특징이다. 현재는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상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7.청주시

 

1)용두사지철당간

 

종 목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2)상당산성

 

종 목 사적 제212호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8.청원군

 

1)계산리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511호  

지 정 일 1969.07.18

소 재 지 충북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48

시 대 고려시대

 

 계산리의 말미장터 남쪽 언덕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위아래 지붕돌의 체감률이 정연하여 전체적인 안정감이 느껴지는 우수한 작품이다.

 

 

 

2)문산관

 

종 목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9호 

지 정 일 1978.02.22

소 재 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6-1

시 대조선시대

 

 조선시대 문의현의 객사이다. 지방 관리들이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한달에 2번씩 궁궐쪽을 향해 절을 올리고,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오면 숙소로 머물던 곳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문의구지』에 따르면 현종 7년(1666) 현령 이명하가 옮겨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9년 대청댐 건설로 인하여 부속건물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옛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총 앞면 10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앞면 3칸·옆면 3칸의 본 건물에, 앞면 3칸·옆면 3칸 및 앞면 4칸·옆면 3칸의 건물을 양쪽에 붙여 지은 것이다. 건축재료와 건축수법에서 건축시기의 차이가 나타나며, 이러한 형태의 건축은 전주객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9.보은군

 

1)법주사쌍사자석등

 

종 목 국보 제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 법주사

시 대 통일신라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삼년산성

 

종 목 사적 제235호

지 정 일 1973.05.25

소 재 지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시 대 삼국시대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10.옥천군

 

1)용암사쌍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1338호

지 정 일 2002.03.12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용암사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 때 의신이 세운 사찰이다.

 

같은 모양의 석탑 2기는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암반 위에 건립되었음에도불구하고 이층 기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탑은 4.3m, 서탑은 4.1m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서탑의 경우 2층과 3층 탑신의 몸돌이 결실되어 새로이 보충해 놓은 것이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에서 매우간략화된 수법을 보이고 있는 이 탑은, 현재까지 확인된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하게 쌍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옥천향교

 

종 목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97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20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61년에 황폐한 향교를 복원하였다. 1966년과 1974년에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14호)과 명륜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고직사 등이다.

 

사당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교화의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유안』·『청금록』·『선안』·『교안』 등 조선 후기 옥천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많은 책을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