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미국에서의 긴 여정 동안 셀마를 방문(6개월동안)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대해서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남부 앨라바마의 이 조그만 도시를 방문하지 않고서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이라고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미국사회역사를 연구했다는 우리나라의 교수님들 중 몇 분이 이 시골 마을을 다녀 왔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왜 셀마가 미국 역사에 그리도 중요한 도시가 되었을까요? 그 이야기는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셀마는 미국 남부 앨라바마 주의 달라스 카운티의 속해 있습니다. 알라바마 주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도시로서 남북전쟁 당시 병참도시 역할을 수행하면서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남부군의 패배 이후 드디어 흑인 노예들은 해방되었으나 백인들의 차별 속에 극심한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비참한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1961년 당시 셀마 시의 흑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57%에 육박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소작인, 일용직 노동자, 하녀, 청소부 등의 하부 계층이었고 교육의 기회 조차 얻지 못하는 문맹자들이었지요.
당시 흑인들은 시민권 자로서 헌법에 보장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권자 등록을 할 때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여 통과하지 못하면 투표권을 박탈하는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물론 백인들을 이런 테스트를 치르지 않고 바로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었지요.
당시 셀마 시의 유권자 등록 상황을 보면 더욱 황당합니다. 흑인 유권자가 15,000명 전체 흑인 인구 중에서 단 130명에 불과했습니다. 1%에도 못 미치는 숫자입니다. 당시 흑인 학생들의눈물겨운 자원봉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흑인들이 테스트를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앨라바마의 주도는 몽고메리시 입니다. 현대 자동자 앨라바마(HMMA)가 진출해있는 도시이지요. 셀마와의 거리는 자동차로 약 한 시간(50 마일)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걸어가기는 힘든 곳이고 거의 대부분 숲과 평원 지대라서 밤에는 늑대와 같은 야생동물의 출몰하는 위험한 도로입니다. 투표권을 박탈당한 흑인들이 했던 유일한 행동은 이 도로를 행진하는 것이 었습니다.
1965년 3월 7일 Boynton 부인과 그녀의 남편의 주도로 600명 흑인들로 첫 행진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지역경찰이 이들의 평화스러운 행진을 쇠 방망이와 최루탄으로 공격했습니다. 결국에는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해산당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진은 세계의 주목을 끌게되고 흑인 인권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지원을 받으면서 두번째 실패이어 세번째 행진을 이어가며 결국에는 몽고메리시에 도착합니다.
결국 이들의 행진을 계기로 흑인들의 투표권이 보장되게 됩니다. 백인 우월주의로 얼룩진 미국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지요. 이것이 “셀마에서 몽고메리 행진”이라는 사건이고 이 도시가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킨 흑인을 비롯한 소수계 인권의 성지라 칭함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셀마를 방문했을 때는 여전히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도시였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이곳의 유권자들은 맥케인을 선택했습니다. 아이러니하지요. 필자가 한 백인동료와 한 식당을 들어갔을 때 백인들 눈빛은 다른 어느 곳보다 날카로왔습니다. 이곳은 흑인들이 오지 못하는 식당이라는 설명을 들고 이해를 했지요. 셀마에서 우연히 한 순박한 흑인 아줌마와 친해졌는데 그 아줌마가 직접 만드는 빵이 너무 맛있어서 만드는 방법을 배우면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 점심식사를 통째로 제에게 주면서 집에 가져가서 식구들과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 친절함에 정을 주지 않을 수 없었네요. 그런데 이 아줌마가 어느 날 직장에서 해고 되었습니다. 흑인 행진을 지도한 Boynton 부인의 영향을 받은 이 아주머니는 백인 상사의 부조리를 회사에 보고했고 이를 이유로 미움을 받다가 사소한 이유로 해고 당한 것입니다. 뿌리 깊이 남아있는 미국의 인종 차별을 걷어내기에는 아직도 많은 유산들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차로 운전하다 보면 단조로운 평야지대가 나타납니다. 인가는 찾아 보기 힘들고 멀리 보이는 지평선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떼들 뿐이지요. 한번은 저녁 9시쯤 깜깜한 밤이었는데 동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물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큰 산불이 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지나니 지평선 넘어로 엄청나게 큰 달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태양처럼 말이지요. 떠오르는 태양은 항상 크게 보이는데 역시 떠오르는 달도 크게 보이 더군요. 그렇게 아름다운 일출 광경은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미국은 지금 긴긴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태양이 지고 난 어두운 밤을 비추는 것은 달의 역할입니다. 미국인들이 오바마 정권에 거는 기대는 이와 같을 것입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어둠을 밝혀주는 그런 역할 말이겠지요. 새벽이 돌아온 미국은 그전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있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셀마는 그 도시 차체가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마치 헐리웃의 영화 셋트장을 연상 시킬 정도로 낡은 건물 투성이 입니다. 아주 따분하고 낙후된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런 도시가 항상 여행객들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자세히 돌아보면 정말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오래된 건물, 주택, 상가, 교회 등이 아주 훌륭한 피사체로 자세를 취해 줍니다. 유유히 흐르는 앨라바마 강을 건너는 오래된 Pettus 다리는 이 도시의 상징입니다. 그 유명한 흑인들의 행진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요. 더군다나 토요일 열리는 벼룩시장에서는 희귀한 앤틱 물건들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 내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풍경들입니다. 남북전쟁 당시의 유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방문한 한 가정의 디너룸벽에는 어느 미국 영화에서 보았던 남부군의 철갑선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올드 데포 뮤지엄은 꼭 가보아야 할 곳 입니다.
셀마에 머무는 동안 신기하게도 한국계 이민자의 태권도 도장과 중국 사람이 하는 스시바를 발견했습니다. 아마 이들이 이 도시의 유일한 동양인인 것 같았습니다. 이미 유단자인 저는 태권도장보다 스시바에 관심이 갔는데요. 아마도 제가 이 스시바를 방문한 유일한 동양인이었을 것입니다. 저를 보더니 상당히 놀란 중국인 주인장은 제가 일본인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형펀없는 맛의 스시를 억지로 먹고있는 저에게 와서 슬쩍 스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했습니다. 식당 주인이 손님에서 조리법을 물어보다니요. 아무튼 저의 조언으로 그 집의 스시 맛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저는 캘리포니아 산 시라XX쌀을 쓸 것과 설탕을 좀더 많이 넣으라고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셀마에서의 6개월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 거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겉모습만 보고 알았던 저에게 큰 경험과 배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미국에 가실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방문해 보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은 조지아의 애틀란타에서 차를 렌트해서 한번에 몽고메리와 같이 둘러보 시는 것 좋습니다. 몽고메리시에 공항이 있지만 비행기 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기 때문이지요.
셀마는 이른바 "블랙 벨트"라고 하는 미국 남부 흑인 지역의 중심에 있습니다. 미국의 다른 어느 곳 보다도 낙후된 시골입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볼 수없는 순진하고 친절한 흑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셀마시의 시장인 제임스 퍼킨스 2세는 흑인이며 이 지역 토박이 입니다. 대학에서는 수학과 비즈니스를 공부했고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입니다. 낙후된 셀마시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셀마의 다운타운 전경입니다.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마치 헐리웃의 영화 세트 같습니다.
에드몬드 페투스 다리, 왠지 허름해 보이는 이 철교에서 바로 이 다리에서 흑인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라하지만 웬지 정겨운 느낌이 드는 셀마 시청 건물입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의 병참 도시였던 셀마를 사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위해 매년 이런 모의 전투 행사를 벌인답니다. 위더스푼 주연한 "스윗 홈 앨라바마" 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유유히 흐르는 앨라바마 강입니다. 여름에는 플로리다에서 올라온 악어도 출몰한다는 군요.
바로 이자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여졌습니다. 투표권을 주장하는 흑인 시위대를 경찰이 쇠몽둥이와 최루탄으로 무차별 공격한 사건 이었지요. 이런 조용한 마을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셀마에는 이런 고풍스런 남부 특유의 오래된 주택들이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장면 같지요.
이 길이 셀마에서 몽고메리도 이어지는 주도 80번 도로 입니다. 인가조차 드문 드넓은 평원을 가로질러야 하고 밤에는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이런 길을 행진했다니 놀랍습니다.
페투스 다리위에서 바라본 앨라바마 강입니다. 멕시코 만의 항구도시 모빌시로 흐르는 이강은 아직도 중요한 교통 수단의 역활을 한다고 하네요.
남부식 간편한 아침 식사입니다. 맛있겠지요?
셀마도 월마트가 들어서면서 지역 상권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월마트만 할인매장이 아니다"라는 지역사회를 생각하는 어느 교회의 구호가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후보 시절 오바마도 셀마 흑인행진 기념하기위한 행사에 동참했습니다. 팔장을 낀 흑인 할아버지의 표정이 결의에 차보입니다.
1965년 당시 결의에 찬 행질을 벌이는 시위대 입니다. 가끔 백인들도 보이네요. 이 당시 사람들은 과연 40여년 후에 흑인 대통령이 나올 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앞으로 미국 사회가 더욱 발전되어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되길 기원합니다.
흑인행진 당시의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서민들을 위해서 힘쓰는 분들은 역시나 좌익 공산 주의로 몰아가는 군요. 울라나 극보수들이 이 것을 보고 배운듯 해서 씁씁합니다.